아이티 난민들 10년을 떠돈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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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못 건넌 강 #미국 국경 #아이티 난민들

최근 몇 주간 주류 언론들은 거의 매일 미국 국경에 몰려든 아이티 난민들에 대한 뉴스를 쏟아냈습니다. 지난 18일 한때 1만5000명에 달하는 아이티인들이 텍사스 국경 델리오라는 작은 도시의 국경 다리 부근에 난민촌까지 형성했었죠. 주류 언론들이 공개한 임시 난민촌의 사진은 아이티 이민자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줬습니다. 초기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던 조 바이든 정부는 국경순찰대가 말을 타고 채찍으로 아이티 이민자들을 쫓는 장면이 공개되면서 논란이 커지자 재빨리 델리오의 이민자들을 해산시켰습니다. 난민촌이 있던 자리는 이제 공터로 돌아갔죠. 하지만 아이티 난민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쟁점들을 짚어봅니다.

애초에 아이티 난민들이 미국 국경까지 온 이유가 뭐야? 

주류 언론들은 그 이유를 지난 7월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이 암살당해 나라가 극도로 불안정해진 상황이라는 점과 8월에 규모 7.2의 강진까지 덮쳐 나라를 떠나는 이들이 늘었다고 꼽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떠도는 삶은 실제로는 11년 전인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무슨 일이 있었어?

그해 1월12일 규모 7.0의 강진이 나라 전체를 뒤흔들었습니다. 건국 이래 최대 규모였던 이 지진의 진앙은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불과 15km 떨어져있었습니다. 내진 설계 건물이 거의 없는 포르토프랭스에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죠. 무려 20만 명 이상이 죽고 180만 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가옥 30만여 채가 파손됐고 정부기관 건물 역시 대부분 소실됐습니다. 또 1300여 개 교육 시설과 50개 의료 시설이 붕괴되는 등 사회 인프라가 완전 무너지다시피 했습니다. 피해액은 79억 달러로 2009년 이 나라의 국내 총생산의 1.2배에 달하는 규모였죠. 이 지진으로 수많은 아이티 국민이 브라질이나 칠레 등 남미로 이민을 떠났다고 합니다.

10년이 지났으니 그 나라에서 정착했을 텐데 왜 미국으로 온 거야?

당시 브라질 정부는 이들에게 ‘인도주의 비자(humanitarian visas)’를 발급해 정착을 도왔죠. 2014년 월드컵과 2016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브라질로서는 일꾼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국제대회 개최가 끝나자 아이티 일꾼들이 더이상 필요 없게 됐죠. 일자리를 잃은 아이티인들은 칠레로 향합니다. AP통신에 따르면 당시 무려 15만 명의 아이티인들이 칠레행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2018년 칠레 정부는 아이티인들에게 비자 발급을 제한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물가가 비싸 살기도 어려웠습니다. 2년간 노점상, 청소부, 건설 인부를 전전하던 그들에게 지난해 연말 들려온 희소식이 있었죠. 이민친화적 공약을 발표한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 뉴스였습니다. 칠레의 아이티인들은 하나 둘 짐을 꾸려 미국으로 북상하기 시작했죠.

몰려든 난민들을 정부는 어떻게 해산시킨 거야?

앞서 말씀드린 대로 대대적인 추방 작업에 착수했죠. 텍사스 국경 마을에 넘어와 있는 이민자들을 고국으로 추방하고, 멕시코로부터 국경을 넘어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특히 지난 21일 텍사스주는 리오그란데 강둑을 따라 공공안전국 소속 수백 대의 SUV 차량을 일렬로 세웠습니다. 강을 헤엄쳐 미국으로 건너오는 아이티 난민들을 막기 위한 차량 바리케이드, 이른바 ‘강철 장벽(steel wall)’으로 불렸죠.

그래서 난민들은 어떻게 됐어?

국토안보부에 따르면 최근 2주간 델리오로 들어온 3만명 가량의 이민자 중 2000명 가량이 아이티로 추방됐고, 8000여 명은 멕시코로 후퇴했습니다. 1만2000 명은 미국에 남아 망명 절차를 밟을 수 있게 됐고, 나머지는 이민자 수용시설 등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난민촌을 해산시키면서 사태는 일단 진정됐지만 아직 불씨가 꺼진 것은 아닙니다.

왜?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현재 콜롬비아 국경 네코클리엔 ‘다리엔 갭’으로 불리는 험한 정글을 통해 파나마로 건너가려는 이민자 1만6000 명이 대기 중이라고 합니다. 대부분 아이티인이죠. 정글을 통과한 후 중미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아이티인들도 수천 명이며, 과테말라에서 들어와 멕시코 남부 국경에 발이 묶인 아이티인들도 많습니다. 일단 멕시코에서 일자리를 구해 머물려는 이들도 있지만 고국을 떠난 아이티인 대다수의 최종 목적지는 여전히 미국입니다. 아이티 난민 문제는 바이든 정부로선 또 다른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악재라니?

이번 사태로 누구보다 난감한 사람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민자 포용 정책이 불법 이민자 수 급증을 견인했다는 비판이 이어지면 서죠. 아프가니스탄 사태로 지지율이 떨어진 그를 흔들 또 하나의 악재가 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아시다시피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직후 전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반 이민정책’과 다른 노선을 택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한 남부 국경장벽 건설을 중단하고, 이민법 개정안을 통해 불법 체류자 등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길도 터줬죠. 공화당 측은 이런 ‘친 이민정책’이 중남미 국가에서 오는 이민자 행렬인 ‘캐러밴’의 북상을 부추겼다고 주장합니다.

난민촌 해산했으니 이젠 정부도 한시름 놓은 거 아닌가?

난민 추방작업을 시작하자 이번에는 민주당이 반발했죠. 트럼프 행정부의 외국인 혐오 정책을 이어간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여기에 아이티로 돌려보내진 난민들의 반발까지 더해졌죠. 아이티인들은 미국이 다른 국적의 사람들은 추방하지 않고 자신들만 쫓겨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실제로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20일 내년 아프간 난민을 포함해 전체 난민 수용 규모를 기존의 두 배 수준까지 늘리겠다고 발표해 아이티인들을 추방한 것은 모순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AP통신은 “이민 정책은 수십 년간 해결되지 않은 복잡한 문제”라며 “바이든 행정부는 쏟아져 들어오는 불법 이민자와 그 속에서 충돌한 이해관계에 발목이 잡혔다”고 진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