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백열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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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추운 겨울날 백열전구의 필라멘트가 타서 터지는 바람에 구멍가게에 새 전구를 사러 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또 조금 커서는 의자 위에 올라가 긴장하며 전구를 갈아 끼웠고, 전구 표면이 뜨거워 손을 델뻔한 기억도 있습니다. 백열등 밑에서 김이 나고 지글대는 음식이 만들어지던 부엌, 전등불 아래서 공부하던 장면도 지나갑니다. 조금 더 커서는 포장마차에 달린 백열등, 목로주점 천장에서 늘어진 전선줄에 달렸던 백열등까지. 백열등은 삶의 중간중간에 친숙한 배경으로 남아 있습니다.
백열등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가 훔친 신의 불에 비교되곤 합니다. 그만큼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인데요. 전구가 없었던 옛날 옛적에 밤은 고요,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백열등은 인류에게 해질녘 이후의 시간을, 활동 가능한 시간을 더 선물했습니다. 또 투명한 전구 안에 들어 있는 필라멘트가 주는 따뜻함은 많은 사람의 기억에 추억으로 새겨져 있기도 합니다. 그런 백열등이 드디어 미국에서 공식 퇴출됐습니다. 1879년부터 세상에 등장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백열등은 20세기 후반부터 비효율적 에너지 사용의 상징으로 낙인 찍히며 겨우 생명력을 유지해왔는데요.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력으로 이제는 효율성은 물론이고 가격 면에서도 더 이상 백열등을 사용해야 될 이유가 사라지면서 역사의 뒷장에 남겨지게 됐습니다. 세계 각국은 21세기 들어 백열등 사용이나 판매 중지를 검토해 왔고 이를 단계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중인데요. 미국은 애초 계획보다 늦어지기는 했지만 결국 자연스럽게 도태되는 과정을 밟았습니다.

토머스 에디슨의 위대한 발명품으로 꼽히는 백열전구는 미국에서 더 빨리 퇴출될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희미하게나마 불빛을 잃지 않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공화당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19년, 이전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입안하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 때 확정된 백열전구 등 ‘저효율 전구’ 퇴출 계획을 전면 백지화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백열전구 퇴출 전면 백지화는 다시 뒤집힙니다. 연방 에너지부가 백열전구가 충족할 수 없는 새로운 에너지 효율 규정을 8월 1일부터 전면 시행하면서 사실상 백열전구의 판매가 금지된 것입니다. 이로써 백열전구는 140여 년 만에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됐습니다.

대신 소비자들은 발광다이오드, 이른바 LED 전구와 같은 고효율 조명기기를 선택해야 하는데요. 백열전구 퇴출을 추진해 온 조 바이든 행정부는 “LED 전구가 초기 비용이 더 많이 들지만, 장기적으론 비용을 절감시켜 준다”고 강조했습니다.
새 에너지 규정은 전구가 전력 1와트당 밝기 단위인 루멘으로 따져 최소 45루멘의 빛을 생산하는 표준을 명문화했는데요. 기존 60와트 백열전구는 1와트당 약 13루멘밖에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 생산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에너지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난해 최소 전구 효율 수준을 다시 1와트당 120루멘 이상으로 높이는 규정을 제안했고, 지난 4월 모든 관련 조치가 마무리되면서 8월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간 것입니다.
에너지부는 “미국 소비자들이 새 규정으로 연간 근 30억 달러의 전기료를 절약할 것으로 기대되며, 30년 동안 지구 온난화 탄소 배출량을 2억2200만톤까지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는데요. 이는 1년 동안 2800만 가구에서 쏟아내는 탄소량과 맞먹는 수준이라고 하네요.
UC버클리의 에너지 경제학자 루커스 데이비스는 “백열전구에서 LED로 교체하는 것은 갤런당 25마일을 달리는 자동차를 130마일을 달리는 다른 자동차로 교체하는 것과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백열등은 사실 전기료나 탄소 배출량 외에 화재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공급되는 전기 에너지의 5%만을 빛으로 전환하고, 나머지 95%를 모두 열로 방출하기 때문에 백열전구 자체에 먼지가 많이 쌓인 경우 화재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북유럽은 2009년 9월 이후, 유럽 연합과 일본은 이미 2012년부터 백열전구의 생산과 판매를 금지했고 한국은 2014년부터 생산과 수입을 전면 중단했는데요.
1887년 2월 경복궁에서 처음으로 불을 밝히고 1990년대 초 가수 이연실이 불렀던 ‘목로주점’이란 노래 가사에도 나왔던 백열등. “오늘도 목로주점 흙바람 벽엔 삼십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
이젠 정말 노래나 영화, 기억 속에서만 볼 수 있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