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베이징 전국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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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동계체전 #문제 장면 넷

#장면 ①

시작은 개막식부터 였습니다. 중국은 한복 차림의 출연자를 소수 민족으로 표현해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지난 4일 개막식엔 중국 내 56개 민족 대표가 차례로 오성홍기를 전달하는 퍼포먼스 순서가 있었는데요. 이 중 조선족 여성이 댕기머리를 한 채 한복을 입고 등장한 장면이 문제가 됐죠. 개막식 전 조선족 자치주가 있는 지린성 소개 영상에는 한복·윷놀이·강강술래 장면도 담겼습니다. 세계가 지켜보는 올림픽 개막식에서 이런 장면을 내보냄으로써 ‘한국 문화를 중국 문화의 56분의 1로 간주하려는 거만한 프레임같아 불쾌했다(김정효 서울대 외래교수)’는 지적이 나왔죠. 한걸음 더 나가 향후 중국의 문화공정이 거침없어질 것이란 우려까지 나왔습니다. 역사 수호 운동을 벌이는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이번 한 장면으로만 그러는 건 아니다. 중국 최대 포털사이트 바이두 백과사전에 ‘한복은 한푸(韓服)에서 기원했다’고 나오고, 중국 게임 ‘샤이닝니키’에 한복이 중국의 복식이라고 소개했고, 갓도 중국이 원조라고 한다. 상당 기간 억지 주장을 반복한 게 ‘문화 동북공정’으로 봐야 할 근거”라고 밝혔습니다.
한복 논란은 스포츠계를 넘어 정치권까지 번졌습니다. 대선 정국에 여야는 연일 중국을 향해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장면 ②

한복 등장으로 ‘설마’했던 우려는 현실이 됐습니다. 21세기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황당한 판정 릴레이가 쇼트트랙에서 이어졌습니다. 중국의 메달 도전을 막는 선수에게는 예외 없이 페널티가 주어졌고 공교롭게도 그 판정의 유일한 수혜자는 개최국 중국이 됐습니다. 올림픽이 아니라 ‘중국 동계체전’이 되어버린 순간들이었죠.
7일 열린 쇼트트랙 남자 1,000m 준결승에서 한국 선수가 줄줄이 탈락했습니다. 먼저 치러진 경기에서 남자 쇼트트랙의 ‘간판’ 황대헌(강원도청)이 중국 선수 둘을 제치고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1위 자리를 빼앗는 과정에서 레인 변경을 늦게 했다는 판정이 내려져 탈락했죠. 황대헌이 탈락하면서 이 조에서는 중국 선수 2명이 결승에 올라가게 됩니다.
이어 열린 경기에서도 이준서가 2위로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레인 변경 반칙을 범했다는 석연찮은 판정으로 또 탈락했습니다. 이 바람에 3위로 통과한 중국의 우다징이 이준서 대신 결승에 진출했죠.
가장 중요한 결승에서도 석연찮은 판정이 이어졌습니다. 바로 위의 사진이 그 장면인데요. 1위로 들어오는 왼쪽의 헝가리 대표 류 사오린 산도르 선수의 팔을 중국의 런쯔웨이가 잡아당기고 있죠. 누가봐도 류의 승리였지만 레이스 뒤 수 분간 화면을 돌려보던 심판은 류 선수가 두 번이나 페널티를 범했다며 탈락시켰습니다. ‘예상대로’ 류의 탈락이 확정되자 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 선수단은 일제히 야유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중국 관중들의 우레와 같은 함성에 묻혀버렸죠.
중국은 남자 1000m 부문에 앞서 5일 첫 메달 레이스로 열렸던 2000m 혼성 계주에서도 석연찮은 판정으로 결승에 진출했고 금메달까지 거머쥐었습니다. 한두 번은 실수나 우연일 수 있지만 세차례 이상 같은 판정이 반복된다면 ‘고의’가 의심되는 건 당연한 것 아닐까요.

#장면 ③

심판 판정 뿐만 아니라 중국의 자국 선수들을 향한 비난도 비상식적입니다.
7일 피겨 단체전 여자 프리스케이팅 경기가 열렸는데요. 이날 중국 대표선수인 주이(朱易·20)가 경기 초반 트리플 플립 점프를 뛰다 균형을 잃고 넘어졌습니다. 주이는 붉은 경기복 차림으로 나서는 바람에 빙판에 나동그라진 모습이 TV 중계 화면에서 더 도드라졌죠. 경기 후 주이는 얼굴을 감싸고 펑펑 울었다. 첫 번째로 뛰었던 그는 91.41점을 받아 5명 중 5위를 기록했습니다. 중국은 결승에 오른 5개 팀 중 5위에 그쳤고 러시아올림픽위원회, 미국, 일본이 나란히 1~3위를 기록했죠.
그러자 주이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주이의 이력 때문인데요. LA에서 중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주이는 2018년 중국 대표 선수로 뛰기 위해 미국 시민권을 포기했습니다. 이름도 베벌리 주에서 주이로 이름을 바꿨죠.
주이는 전날인 6일 쇼트 프로그램을 통해 올림픽 데뷔전을 치렀는데요. 그가 아이스링크에 모습을 드러내자 경기장의 중국 관계자들은 열렬한 호응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주이는 첫 콤비네이션 점프에서 착지 도중 넘어져 벽에 부딪혔죠. 마지막 점프에서도 회전 타이밍을 놓치는 등 잇단 실수로 10개국 출전 선수 중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이로 인해 중국팀 순위는 3위에서 5위로 떨어졌습니다. 피겨 단체는 10개국 중 쇼트 프로그램 상위 5개국이 결선(프리 경기)에 진출해서 프리 점수와 이전의 쇼트 점수를 합쳐서 메달 순위를 정합니다. 전날 쇼트 부진을 만회 못 한 중국이 7일 ‘노메달’에 그치자 중국의 트위터 격인 웨이보에는 책임을 주이에게 돌리는 원성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6일 “주이가 올림픽 데뷔전에서 넘어진 후 소셜미디어(SNS)에서 중국 팬들의 비난을 받았다. 웨이보에는 ‘주이가 넘어졌다’는 해시태그가 등장했고, 몇 시간 만에 2억뷰를 기록했다”고 전했습니다.
주이와 함께 주목받고 있는 또 다른 외국 출생 중국 선수가 있습니다. 주이처럼 미국 태생인 구아이링(19)인데요. 에일린 구라는 본명을 버리고 2019년 중국에 귀화한 그는 프리스타일 스키 3관왕 유력 후보입니다. 그는 이번 올림픽에서 중국의 얼굴이라고 불릴 만큼 주목을 받고 있죠. 그는 지난  7일 열린 여자 빅에어 예선에서 점프에서 실수를 범해 5위로 결선에 올랐는데요. 현재까지는 그에 대한 여론이 호의적입니다. 웨이보에는 ‘구아링의 실수 후 표정이 귀엽다’는 해시태그가 인기 검색어 순위에 오르는 등 기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CNN은 이날 “금메달을 따지 못해도 그를 향한 찬사가 계속될지는 미지수”라고 꼬집었죠. ‘잘하면 중국인, 못하면 미국인’이라는 중국 여론의 이중잣대가 기우이길 바랍니다.

#장면 ④

몸을 부딫히는 스포츠 경기 특성상 아무리 조심해도 감염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양성 판정을 받은 선수들은 격리 호텔에 묵게 되는데요. 호텔의 부실 식단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러시아 대표선수인 발레리아 바스네초바는 지난 5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본인이 격리된 호텔에서 지급한 위의 식사 사진을 올렸는데요.
그는 “5일 연속 아침· 점심· 저녁 식사로 파스타, 양고기, 감자로 된 똑같은 메뉴만 받고 있다”는 글도 게시했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파스타 소스와 반쪽 감자 다섯 개, 까맣게 탄 고기 등이 도시락 용기에 담겨있죠. 바스네초바는 “다른 음식은 먹을 수가 없어서 파스타 한가지만 먹고 버티고 있다”며 “배가 아프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눈가엔 다크서클이 생겼다. 몸무게가 줄면서 뼈가 드러나고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이어 “너무 힘들다. 매일 매일 울고 있다.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다”며 “모든 것이 그저 끝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죠.
앞서 독일 노르딕 복합 경기 선수단 단장도 격리 호텔에 대해 공개 비판했었죠. 노르딕 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 3개를 딴 에릭 프렌첼 선수가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고 격리된 뒤 단장은 “격리 호텔 방이 너무 좁고 비위생적이며 음식이 제때 나오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들의 불만은 ‘진수성찬’을 기대했거나 오성급 호텔을 바랐던 데서 기인한 것은 아닐겁니다. 그들이 주최국에 기대한 건 밤낮없이 메달을 향해 달려온 그들의 노력이 감염 때문에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좌절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겠죠.

#feat. 안현수ㆍ빅토르 안ㆍ안셴주

사실 이번 심판 판정에 대한 시비는 단순이 홈 텃세로만으로 보긴 어렵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냉정하게 바라볼 때, 한국 쇼트트랙팀은 이번 올림픽에서 중국의 ‘금메달 만들기 작전’의 들러리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의견이죠. 올림픽 개최국은 홈 그라운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려고 메달 가능성이 있는 핵심 종목을 선정해 치밀하게 준비하죠. 중국도 메달 획득의 전략을 짰고, 금메달 9개가 걸린 쇼트트랙을 핵심 종목으로 분류했습니다. 중국은 평창올림픽이 끝나자 세계최강을 자랑하는 한국 쇼트트랙의 인력을 끌어 모았는데요. 평창올림픽에서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 감독을 지낸 김선태 감독과 평창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임효준입니다. 임효준은 귀화해 린샤오쥔이라는 중국이름까지 얻었습니다.
이 두사람 못지 않게 중국 대표팀 소속으로 크게 주목을 받은 한국인이 있습니다. 지난 5일 쇼트트랙 2000m  혼성계주에서 중국이 금메달을 확정하자 두팔을 들고 환호하던 사람인데요. 중국 CCTV가 그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중국 쇼트트랙 성과 뒤에 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다. ‘전설의 거성’ 안셴주도 그 중 한 명이다.”
안셴주는 안현수(安賢洙)의 중국어 발음입니다. 대회 등록명은 빅토르 안(Viktor Ahn)이죠. 안현수, 빅토르 안, 안셴주. 그는 무려 세 나라 소속으로 올림픽에 참가했습니다. ‘스포츠 노마드(nomad·유목민)’ 빅토르 안을 향한 시선은 엇갈리고 있죠.
안현수의 삶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습니다. 서울 태생인 그는 2006년 토리노올림픽에서 압도적인 레이스로 금메달 3개를 휩쓸었죠. 2011년 러시아로 귀화해 ‘빅토르 안’으로 개명한 그는 2014년 러시아에서 열린 소치올림픽에서 다시 금메달 3개를 목에 걸었습니다. 선수로 올림픽에서만 금6, 동2개를 쓸어 담은 그는 ‘쇼트트랙의 마이클 조던’, ‘쇼트트랙을 위해 태어난 남자’라 불렸습니다. 2020년 은퇴한 그는 중국 쇼트트랙 대표팀 기술 코치로 부임하게 됩니다.
8년전 소치올림픽 당시 많은 한국인 팬들은 대한빙상경기연맹을 질타하며 “대한민국이 안현수를 버렸다”고 안현수의 편을 들었습니다. 심지어 안현수가 귀화한 러시아 쇼트트랙을 응원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번 올림픽에선 반응이 좀 다릅니다. “러시아에 간 것까지는 이해하는데, 중국까지 간 건 좀…”이란 시선이죠. 최근 반중 정서가 강해진 데다, 한국체대 출신 안현수가 파벌싸움의 ‘희생양’이면서도 ‘수혜자’란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죠. 또 안현수가 귀화 전에 체육연금을 일시금으로 수령한 게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한 네티즌은 “국적은 러시아고, 돈은 중국에서 버는데, 가족은 한국에서 지내는가”고 지적했습니다.
반면 “세계적으로 능력을 인정 받은 이의 개인 선택”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쇼트트랙 관계자 B씨는 “한국 쇼트트랙 지도자 연봉은 4000만~6000만원 정도인데, 러시아와 중국은 최고 대우를 해줬다. 안현수를 비난한다면 다른 나라 양궁·태권도 대표팀을 지도하는 한국 코치진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고 말했습니다.
안현수, 빅토르 안, 안셴주라는 서로 다른 이름을 금메달을 향한 집념으로 봐야할까요, 태극마크보다 앞선 개인의 욕심으로 봐야할지 의견은 엇갈립니다. 다만 한가지 팩트만큼은 분명합니다. 한국, 러시아, 중국 어디에 가더라도 탁월하게 두각을 나타낸 그의 실력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