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추모의 날’은 공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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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이곳 LA 지역 학교들은 휴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날은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추모의 날(Armenian Genocide Remembrance day)’이었기 때문인데요.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매년 4월 24일을 잊지 않고 추모 행사를 열면서 비참하게 목숨을 잃은 선조들의 넋을 기리고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세대에게 함께 뭉쳐 새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올해로 108회를 맞은 추모의 날에 아르메니아계 커뮤니티는 다양한 행사를 준비했는데요.
커뮤니티 차원에서 집단학살 추모의 날 행사는 그 동안 꾸준히 진행되어 오다 아르메니아계 이민자가 많이 거주하는 글렌데일 통합교육구에서 2013-14 학사년도부터 매년 4월 24일을 휴교일로 정하면서 추모의 날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도 커지는 계기가 됩니다. 2020년에는 LA 통합교육구 교육이사회가 이날을 휴교일로 채택합니다. 그리고 지난해 2022년 9월에는 캘리포니아의 공식 공휴일로 지정되는 성과를 거두기까지 하는데요. 개빈 뉴섬 주지사가 관련 법안에 서명하면서 휴일이 법제화됐습니다. 주 공휴일로 정해졌기 때문에 가주 내 모든 공립 학교와 커뮤니티 칼리지는 이날 휴교합니다. 이에 앞서 2021년에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오토만 제국에 의해 수백만 명의 아르메니아 민족이 살해되거나 추방된 사건에 대해 ‘집단 학살’이라는 표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 동안 미국 대통령들은 중동 지역에서의 힘의 균형과 나토 동맹국인 튀르키예와의 중요한 관계에 피해가 있을 것 등을 고려하거나 우려해 ‘집단 학살’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는데 바이든 대통령이 그것을 깨고 과감히 사용한 것이지요. 아르메니아 민족으로서는 정치적으로 큰 승리를 얻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추모의 날이 되면 평화 시위를 비롯해 많은 행사가 열립니다. 또 지역 정치인들도 적극적으로 참석하거나 지원합니다.

올해는 24일 할리우드 불러바드와 웨스턴 애비뉴에서 오전 10시부터 정의를 위한 평화 행진으로 시작했는데요. 이 행사는 ‘통합 청년 아르메니아인(Unified Young Armenians)’이 주최가 되어 열렸구요, 이 단체는 또 지난 23일 아제르바이잔 영사관 앞에서 라친 회랑(Larchin Corridor)을 즉각적으로 개방하라고 요구하는 시위도 주도했습니다. 라친 회랑은 아르메니아 본토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연결하는 유일한 육로로 이를 통해 식량과 의약품이 공급되는데 최근 아제르바이잔 주민들이 이 통로를 막고 있어 해당 지역 아르메니아 주민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국제사법재판소도 아제르바이잔에 대해 라친 회랑에 대한 봉쇄를 중단하라고 명령할 정도로 심각한 이슈라고 하네요.

LA와 인접한 글렌데일에서는 이날 저녁 제22회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추모 이벤트가 열렸는데요. 올해는 아르메니아 영화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렌즈를 통한 아르메니아인의 경험’이라는 주제로 열렸습니다.

아르메니아 집단학살은 1915년 오토만 제국이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지금은 이스탄불)에서 아르메니아 커뮤니티 리더와 지식인 수백 명을 체포하면서 시작됩니다. 이 당시 아르메니아인은 현대의 튀르키예(옛 터키) 전역에 퍼져 살았는데요. 현대 역사학자들은 그 시절 튀르키예 정부에 의해 살해된 아르메니아인이 최대 15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합니다. 또 80만~120만 명은 세계1차 대전 기간 동안 튀르키예에서 추방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추방된 이들은 대부분 중동이나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위치한 코카서스, 러시아, 유럽, 미국 등으로 뿔뿔이 흩어집니다. 하지만 튀르키예는 당시 내전 등으로 많은 사람이 숨졌고 그 안에 아르메니아인도 포함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지금까지도 잘못을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같은 기간에 그리스인과 아시리아인, 야지디인도 대량 학살되거나 강제로 추방돼 도망 다닌 역사가 있습니다.

잔인한 달로 표현되기도 하는 4월은 ‘집단 학살 인식의 달’이기도 합니다. 매년 홀로코스트 추모의 날 행사가 이 달에 열리는데요. 캄보디아, 이라크 쿠르드족, 르완다, 보스니아, 수단의 다르푸르 등에서 발생한 집단 학살을 추모하는 행사도 마찬가지로 이 달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20세기에 벌어진 대량 학살이나 집단 학살 관련 행사의 대부분은 고인들의 죽음을 기리고 학살자들을 비난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었는데요.

하지만 최근에는 더 넓은 관점에서 관찰하고 인지하려는 연구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대규모 폭력은 수많은 복잡한 요인들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인데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흐름 외에도 표적이 된 사람들의 저항과 회복력이 학문적 작업과 대중의 이해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경향이 생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기억이나 기록만이 아니라는 것을 아르메니아인들은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발전된 미래를 위해 과거에 일어났던 일은 더 이상 따지지 말자는 얼빠진 역사의식 없는 정치 지도자들은 이해하기 힘들겠죠. 쓰라린 역사를 되새김질 하는 것은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해 겪지 말자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미주 한인사회 지도자들은 아르메니아계 커뮤니티의 노력으로 이곳 미국에서 시 차원에서, 주 차원에서, 그리고 연방 정부 차원에서 하나씩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주류사회와의 관계에서 어디에 초점을 맞춰 커뮤니티의 목소리를 내고 행동해야 할지도 고민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