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 출신 시니어들이 연방 하원의 ‘용맹법안’ 통과와 관련해 ABC7 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ABC7 뉴스]
지난 5월 하순 연방 하원에서는 한국군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미국 내 한인에게 연방 정부의 의료 혜택을 제공하자는 법안이 통과됐는데요. 이른바 ‘용맹 법안(VALOR Act)’으로 불리는 법안인데 연방 하원 재향군인위원회 민주당 간사인 마크 타카노 의원이 지난 1월 대표 발의해 상정됐습니다.
지난해에도 하원을 통과한 2023회계연도 국방수권법안에 포함됐었는데요. 하지만 상원의 문턱까지는 넘지 못하고 회기 종료로 자동 폐기된 바 있습니다.
하원을 통과한 이번 법안도 상원 표결을 거쳐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야 법으로서의 효력을 가지게 되는데 상원 표결이 가장 큰 난관으로 지목됩니다.
이 법안은, 미국의 연합군으로서 1,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유럽 국가의 참전 용사들에게 제공되는 연방 보훈부의 의료 혜택을, 베트남전에서 미군과 함께 싸운 한국군 출신 시민권자에게도 적용하기 위한 취지로 마련됐는데요. 구체적인 법 적용 대상은 1962년 1월 9일부터 1975년 5월 7일 사이, 혹은 보훈장관이 적절하다고 판단한 기간에 한국군 소속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기록이 있어야 합니다.
타카노 의원은 하원에서 법안이 통과한 뒤 보도자료를 통해 “미국 시민이 된 베트남전 참전 한국계 용사들은 미국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용감하게 싸웠음에도 보훈부의 의료 서비스에서 완전 배제됐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어 “하원에서 이런 부당함을 시정할 나의 초당적인 한국계 미국인에 대한 ‘용맹 법안’을 통과시켜 매우 기쁘다”면서 “이번 법안 통과로 베트남전 참전 용사 출신의 한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보훈부 의료 서비스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한 걸음 더 다가섰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타카노 의원실은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전 참전 한인이 약 3000명 정도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미국이 왜 베트남전 참전 한인들의 건강까지 챙기려 하는 것일까요?
배경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언뜻 미국 정부가 자비심이 많고 배려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사실은 미국 정부가 지금까지 마땅히 줬어야 할 혜택을 아직도 주지 않고 이런 저런 핑계로 뭉그적거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의료 혜택 외에도 금전적 보상 등 더 많은 혜택을 줬어야 하고 앞으로도 그런 방향으로 법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이유는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미국의 반 강제적 권유에 응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지요. 베트남 전쟁에서 수많은 한국인 청년들의 생명이 희생되고 불구자가 나왔습니다. 또 적들을 쉽게 노출시키기 위해 무차별 살포했던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로 인한 후유증은 전쟁이 끝나고도 이어졌습니다. 베트남 전에 참전했던 수많은 군인들이 제대 뒤에도 사회에 정상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거나 병을 얻어 일찍 생을 마감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특히 고엽제 화학물질 ‘에이전트 오렌지’의 후유증은 상상 이상으로 심각합니다. 지금도 많은 한인 참전 용사와 미군, 그리고 현지에 살고 있는 베트남 사람들이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지요.
한국군은 누구보다 베트남전에서 용맹하게 싸웠는데요. 그러나 미국에서 베트남전과 관련해 한국군과 관련된 연구 성과는 거의 전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의 한 교수는 “단지 베트남 정책 관련 국무부와 국방부 문서에서 한국군이 나타날 뿐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 자료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리고 이런 점은 베트남 전쟁 내용을 포함한 세계현대사 개설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하네요. 베트남 전쟁에서 5000명이 넘는 사망자와 그 두 배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한국군은 미국이 승리하지 못하고 떠난 베트남전에서 유령으로 남은 것입니다. 그래서 보상이나 혜택에서도 제외된 것일까요?
그런데 한국 정부도 미국 정부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바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한국 사회가 10.26사태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격동기를 겪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한국 정부는 베트남전 참전 군인에 대한 배려나 보상, 치료 등을 제대로 챙기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에게도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에 대해 제대로 보상하고 보살펴 달라는 요구를 하지 못합니다. 미국이 파병을 요청한 결과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고 오히려 더 많은 보상과 책임까지 물어야 했음에도 한국 정부는 너무나 무기력했습니다.
하지만 미군은 물론이고 호주와 뉴질랜드의 베트남전 참전 퇴역장병들은 고엽제 생산업체를 상대로 대규모 소송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1984년 고엽제 생산 제약회사들과 1억 8000만 달러 상당의 피해자 보상기금 설치에 합의하구요, 이 기금에서 각종 후유증 치료비와 보상금을 받고 있습니다. 대상은 미군 18만 명, 호주와 뉴질랜드 군인 출신 6만 명 등 24만 명 이상입니다. 하지만 한국군 출신은 이런 재판이 열리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고 하네요. 한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고엽제전우회가 뒤늦게 1994년 7월 고엽제 피해 환자 25명과 미국 버지니아 주의 임파선암 교포 환자 1명 등 26명을 원고로 다우케미컬 등 6개 고엽제 제조사를 상대로 제소에 나섰지만 모두 패소하거나 기각됐다고 합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이어진 베트남전에 파병된 한국군은 34만5000여명이고 이 가운데 지난 2월 말 기준 생존자는 17만9000여명이었습니다. 여기에 한국 국가보훈처가 인정한 사망자 포함 고엽제 누적 피해자(후유증/후유의증) 수는 13만6700여명으로 집계됐습니다.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정되는 질병은 초기에는 피부병 관련 정도였으나 이후 20가지로 늘었다가 최근에는 방광암, 다발성경화증, 갑상샘기능저하증, 비전형파킨슨증 등 4개 질병이 추가 인정되면서 24개로 늘었습니다. 이에 따라 피해 보상이 이뤄질 경우 혜택 범위도 더 늘어납니다.
미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전 참전 한인 수는 타가노 의원실이 추산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인 3000명 정도로 관련 단체는 추산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번 ‘용맹법안’의 하원 통과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더 빨리 혜택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그리고 지금도 신속하게 진행되지 않는 것에 불만입니다.
‘베트남전 참전 한인 미주총연합회’의 어거스틴 하 회장은 최근 미국의 소리(VOA)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법안 통과가 고무적이라면서도 미국과 함께 싸운 동맹국의 참전 용사 출신 한인들에게 이런 혜택을 보장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 대한 답답함을 토로했는데요.
그는 특히 연방 보훈부의 의료 서비스는 베트남전 참전 한인들이 받아야 할 혜택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미국을 위해서 월남전에 참전했는데 미국 퇴역군인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지 의료 서비스만 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 의료 서비스는 미국 퇴역군인이 받는 (혜택) 일부에 불과한 것이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모든 베네핏, 연금이라든지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의료 혜택은 베트남전 참전 한인들이 연방 정부로부터 받아야 할 혜택의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죠. 그리고 이번 법안이 시행돼도 제공되는 의료혜택에 드는 비용의 최종 부담자는 한국 정부여서 사실 미국 정부나 의회가 이 문제를 이렇게 늑장 처리할 이유가 없는데도 지금까지 처리되지 않고 있습니다. 연방 의회예산국에 따르면 법안 시행 시 보훈부가 베트남전 참전 한국계 미국인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관련 비용을 한국 정부에 청구하면 한국 정부가 이를 환급하는 방식으로 계산된다고 하네요.
사람이 전쟁을 겪으면 그 후유증은 대단합니다. 미국의 경우만 살펴봐도 2001년 9.11 테러 사건 이후 20년 간 진행된 ‘테러와의 전쟁’에 투입된 전현직 미군들 중 후유증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한 병사의 수가 3만 명을 넘는다고 하네요. 전쟁 트라우마와 스트레스 외에도 군대 특유의 문화와 훈련 방식, 지속적인 총기 사용, 전장에서 복귀 후 일상 생활 적응의 어려움 등이 원인이겠죠. 그런데 베트남전에서는 인류가 만들어낸 독 중 가장 강력한 독이라는 고엽제를 무차별로 살포함으로써 전쟁에 참여했던 수 많은 병사들을 또 다른 고통 속에 살아가게 한 것입니다. 피부병을 비롯한 각종 질환과 암을 유발하고 임신 여성의 경우 기형아를 출산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또 고엽제 노출로 인한 피해가 단기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10년이 넘는 기나긴 시간 동안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이어지고 후유증을 앓게 합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미국 정부의 베트남전 참전 한인 퇴역군인들에 대한 의료 혜택과 금전적 보상은 이뤄져야 마땅하다는 생각입니다. 또 한국 정부도 이제는 먹고 사는 문제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국력이 커진 만큼 그에 합당한 피해 보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합니다. 미국과 한국 정부가 그토록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 자신의 청춘을 희생한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혜택과 보상이 이뤄지는 것 또한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꼭 필요한 조치가 아닐까 여겨집니다.